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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6일 밤 강원 강릉시 오죽헌 인근 경포생태저류지 일원에서 '경포달빛아트쇼 나의 달'이 운영되고 있다.
옛날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정읍사>를 배울 때 기억을 문득 떠올린다. "노피곰 도ᄃᆞ샤.... 즌ᄃᆡᄅᆞᆯ 드ᄃᆡ욜셰라." 무슨 외국어 같은 단어들의 조합을 더듬을 때는 머리가 아팠지만 번역본(?)을 대하면 백제의 한 여인이 노래를 읊조리는 풍경이 그림같이 펼쳐졌다. "달님이시여, 높이높이 돋으시어 멀리멀리 비춰 주소서. 시장에 가 계신가요. 위험한 데 발 디디실까 두렵습니다."
해가 있을 때 사람들은 일상에 얽매이지만 달이 뜨면 생각이 많아진다. <격양가>의 "일출이작 일입이식(日出而作 日入而息)", 즉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쉰다는 말처럼 고단한 일상을 보내다가 해가 지면 그제야 하늘이 보인다. 두고 온 고향, 떠나간 사람, 아스라한 추억들이 달무리가 돼 달을 맴돈다. 이백의 시 한 구절. "고개 들어 밝은 달 바라보다가 고개 숙여 고향을 생각하네."(擧頭望明月 低頭思故鄕)
자(字)인 '태백'(太白)을 붙여 '이태백'으로 널리 알려진 이 시인은 유독 달을 좋아했다. 중국 아닌 우리 땅에서도 달에는 계수나무와 떡방아 찧는 토끼와 함께 이태백이 깃들어 있었다. 죽음을 몇 달 앞두고 도쿄에 머물던 이상은 훗날 유고로 발표된 수필 <동경(東京)>에서 쓴다. "이태백이 놀던 달아! 너도 차라리 19세기와 함께 운명하여 버렸었던들 작히나 좋았을까." 1897~1898년 <미국 민속학 저널(Journal of American Folklore)>에 채록된 한국 노래에도 이미 "달아 달아 밝은 달아 / 이태백이 놀던 달아"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왜 조선의 아이들이 이태백이 놀던 달만 찾아야 하는가." 부아가 치민 사람이 있었다. 동요 작가 윤석중이었다. 그는 1974년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의 버젓한 달을 두고도 천 이백여 년 전 당나라 시인이 술과 더불어 즐기던 '이태백(李太白)이 노던 달아'를 부르며 자라는 동안 어릴 적부터 사대사상(事大思想) 모화사상(慕華思想)은 싹텄다." 그래서인지 우리에게 익숙한 달 노래 가운데는 유난히 윤석중의 작품이 많다.
<달마중>(1929)은 그 가운데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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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가야 나오너라 달마중 가자." 반세기쯤 뒤 유신 시절의 '국민학생'이었던 나는 툭하면 실시되던 등화관제 훈련 때 이 노래를 골백번 불렀다. 사이렌이 울리고 동사무소 방위들이 "불꺼!"를 외치며 돌아다니면 동네는 삽시간에 꼬마들의 놀이터가 됐다. 불을 꺼야 할 뿐 통행금지는 아니었으므로 아이들은 방위 아저씨들을 따라 "불꺼!"를 외치며 온 동네를 누볐다. 축구공이 담을 넘어갔는데 문을 안 열어준 심술궂은 집에 불이 켜져 있으면 욕설까지 보태며 소심한 복수를 하기도 했다.
그 암흑의 동네에서 도시 촌놈인 나는 처음으로 '달그림자'를 봤다. 달빛에도 그림자가 생긴다는 사실을 육안으로 영접한 것이다. 이상이 한탄한 20세기의 전깃불이 꺼지니 19세기 이전의 달이 휘영청 밤하늘의 암흑 커튼을 열었다. 아이들은 온 동네를 누비며 노래했다. "아가야 나오너라 달맞이 가자." 원가사는 '달마중'이었지만 우리는 '달맞이'라고 불렀다.
<달마중>의 작곡가는 홍난파였다. 노래를 부른 서금영(1910~1931)은 '최초의 동요 가수'로 꼽히지만 스물한 살에 장티푸스로 세상을 떠났다. 병원에 입원해 숨을 거두기 이틀 전까지 라디오 방송에서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그녀는 자신의 노래가 레코드판에 담겨 나오기 전에 죽었다. 동생 서기영 교수가 누이의 거의 사라진 흔적을 찾아 헤맨 덕에 우리는 오늘날에도 100년 전 그녀의 <달마중>을 들을 수 있다.
장대 들고 망태 들고 보름달 하나 따서
▲ 동요 작가 윤석중
ⓒ EBS
윤석중의 또 하나의 노래 <달 따러 가자>는 1932년에 나왔다. 그는 훗날 이 노래를 썼더니 "무슨 헛소리냐, 미쳤느냐고 난리"였지만 정말 인간은 달에 갔다며 "동요는 꿈을 심어주는 것"이라고 회고했다. 천년도 더 전 외국 시인이 노니는 선계(仙界)가 아니라 장대 들고 망태 들고 동무들끼리 딸 수 있는 달이란 얼마나 살가운가. 그런데 이 노래의 묘미는 2절에 있다.
"저 건너 순이네는 불을 못 켜서 밤이면은 바느질도 못 한다더라." 그러니 달을 따서 그 집에 달아주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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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기 삯바느질은 가난한 가정의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어머니들이 호롱불 켜놓고 밤새 만들어내는 옷가지가 한 가족의 희망일 때도 많았다. 그런데 등잔 기름이라도 없으면 바늘귀에 실을 꿸 수가 없다. 그런 집에 달을 달아주자는 노래였으니 어찌 정겹지 않았을까.
이 노래와 겹치는 또 하나의 장면이 역시 등화관제 훈련 중에 있었다. 허름한 판잣집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자 방범대원들이 달려가 불 끄라고 호령했다. 한 아주머니가 약간 울먹이며 하소연했다. "전기는 껐어요. 이거 오늘 밤까지 끝내야 돼요. 그래서 플래시 켜놓고 하는 건데." 무슨 가내 수공업 부업을 하는 집이었던 것 같다. 방범대원은 "나중에 30분 잠 안 자면 되잖아"라고 소리쳤다.
우리는 혹시 불이 다시 켜질까 한동안 지켜봤지만 그 집에서는 더 이상 불빛이 새어 나오지 않았다. 그 아주머니에게 그 30분은 얼마나 길었을까. 달빛이 조금만 더 밝기를 기도하지는 않았을까. 장난꾸러기였던 나는 그러지 못했지만 마음씨 고운 아이들은 장대 들고 망태 들고 보름달 하나 따서 그 판잣집 처마에 달아주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윤석중의 달은 "동산 위에 떠올라 어둡던 마을을 대낮처럼 환하게" 만드는 보름달로도 떠오른다. 권길상이 곡을 붙인 <둥근달>이다. 중동 파견 노동자 출신의 한 아저씨는 인터뷰 중 이런 얘기를 했다. "명절날만 되면 그렇게 처량해지는 거야. 음력 8월 15일은 안 세어보고도 알아. 보름달이 뜨잖아." 동료가 밀가루 반죽에 대추야자 비슷한 잼을 넣어 송편을 만들었는데 "하, 난 지금도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어요." 그들은 그 송편을 먹으며 사막 너머 고향의 보름달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로부터 얼마 후 나는 부천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을 취재하게 됐다. 추석은 그들에게도 큰 명절(?)이었다. 그때만큼은 공장을 돌릴 수가 없었기에 20개국이 넘는 노동자들이 '월드컵' 축구대회도 열고, 각종 행사도 가진다고 했다. 당시 만난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은 만나자마자 노래 연습을 시작했다. 행사장에서 부를 거라고 했다.
그게 윤석중의 <둥근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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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럼탈(보름달), 퉁컨탈(둥근달) 통산 우이 트올라~(동산 위에 떠 올라~)" 어느 간사님이 이 곡을 부르면 (。수 매기는) 한국 사람들이 。수 많이 줄 거라고 가르쳐 줬다고 한다. 발음은 찌그러졌지만(?) 그들의 표정은 보름달처럼 밝았다. "우리 무슬림들은 초승달 좋아하는데 헤헤."
그들이 손에 쥔 보름달
▲ 1976년 나온 보름달은 빅히트작이자 전통의 브랜드가 됐다.
ⓒ 삼립
우리 세대에게는 '보름달' 하면 떠오르는 것이 하나 더 있다. 빵이다. 초등학교 1학년 무렵 처음 먹은 '삼립 보름달'의 달콤함은 지금도 미각 세포에 남아 있다. 이 빵은 잔업 하는 여성 노동자들에게도 야식으로 지급됐다. YH 여성 노동자들도 밤 10시까지 야근하면 보름달 하나씩을 받았다. 그들은 맛있는 빵을 혼자 먹기 아까워 고향에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며칠씩 모으면 빵이 상하고 망가졌다. 그래서 나온 아이디어가 '빵계'였다. 계모임처럼 차례를 정해 한 사람에게 보름달 열 개를 몰아줬다. 그날의 계주는 열 개의 보름달을 한꺼번에 고향으로 부칠 수 있었다. 본인은 안 먹어도 배가 불렀으리라. 고향 식구들 얼굴을 대낮처럼 환하게 만들 '보름달'을 소포로 부치면서 그들의 어깨에는 얼마나 힘이 들어갔을까.
보름달은 한 달에 한 번 어김없이 뜬다. 그러나 사람들은 달을 바라보며 자기 소원만 빌었던 것은 아닌 모양이다. 윤석중의 노래 속 아이들은 바느질을 못 하는 순이네를 걱정하며 달을 따러 갔고, YH의 어린 노동자들은 자기 보름달을 고향의 부모와 동생들에게 보냈다.
하늘의 보름달은 아무리 바라봐도 줄어들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이 손에 쥔 보름달은 달랐다. 내가 먹으면 사라졌다. 고향의 동생에게 보내려면 내가 먹지 않아야 했다. 결국 그들이 나눈 것은 빵 몇 개가 아니라 어쩌면 '내 몫', 포기하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내 몫이었을 것이다.
보름달이 아무리 밝아도 시커먼 곳은 도처에 남는다. 전깃불이 넘쳐나는 세상에서도 불빛 하나 아쉬운 사람이 있고, 명절이 즐거운 게 아니라 외로운 사람들도 있다. 그럴 때 장대와 망태를 들고 달을 따 순이네 집에 걸어주는 마음이 늘어났으면 좋겠다. 더 아쉬운 사람을 위해, 더 좋아할 사람을 위해 내 몫 하나쯤 꾹 참아 건네는 마음도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들이 모여 우리 세상을 밝힐 보름달이 머리 위에 둥시쿵 떠오를 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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